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프린켑스의 지위 ===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후에 옥타비아누스는 비공식적이지만 로마 공화정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옥타비아누는 내전의 최종 승리자로서 로마 군단의 절대적인 지지와 이집트를 비롯한 막대한 부를 손에 넣고 있었고 신격화된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후광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로마는 형식상으로는 여전히 공화정이었고 로마 시민은 왕정이나 독재관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술라는 독재관이 되어 무자비한 대숙청을 통해 반대파를 모두 제거하면서 은퇴 후에도 안전을 보장받았지만 술라가 구축한 로마 원로원 중심의 통치 제도는 이미 거대한 제국이 된 로마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점이 증명되었다. 이 때문에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이 되어 로마 원로원의 힘을 누르고 효율적인 통치체계를 갖추고자 했지만 반대파를 숙청하지 않고 그대로 포용하면서 결국 암살당하고 말았다. 옥타비아누스도 술라가 추구한 로마 원로원 중심의 과두제의 한계를 잘 알았지만 카이사르처럼 암살당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원하는 것들을 맞춰가며 차근차근 권력을 손에 넣고자 하였다. 먼저 옥타비아누스는 독재관의 지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내정의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BC 31년부터 BC 23년까지 9년 연속으로 집정관의 자리를 맡으며 권력을 독점했다. 9년 연속 집정관의 연임은 매우 이례적이기는 하지만 [[가이우스 마리우스]]도 5년 연속 집정관을 연임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내전 당시 소유한 로마 군단에 대한 최고 지휘권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었고 금화와 은화의 발행권도 가지고 있었다.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가 왕위에 오르려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했지만 현실적으로 옥타비아누스의 권력을 무너뜨릴 힘이 없었다. 다만 BC 29년 로마 원로원은 '로마 제1시민(princeps civitatis)'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는데, 흔히 프린켑스라고 알려진 이 칭호는 로마 원로원 중 높은 위신과 덕망을 지닌 원로의원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부여하던 명예직에 불과한 것이었다. 로마 원로원으로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왕이 아닌 로마의 시민으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여한 것이었으나 로마 공화정의 껍데기는 유지한 채 사실상 제정을 추진하던 옥타비아누스는 '프린켑스'라는 칭호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